차별금지법이 필요한 이유
4월 11, 2011 in 사는 이야기, 차별금지법 뜯어보기 by admin
법대가지 마세요.
제가 나온 법대에서는 전공 필수 과목이 무려 20개였습니다. 헌법, 민법, 형법을 쪼갠 여러 과목들,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행정법 두 과목, 국제법 두 과목, 그리고 수많은 상법 과목들(보험해상법, 어음수표법 등), 이 모든 필수 과목을 수강하고 나면 대한민국 기본 법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한마디로 어른들이 저한테 항상 권유했던 “쓸데 있는 공부,” 즉 졸업 후 실생활에서 써먹을 수 있는 공부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회에 나가자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법체계인 법전과 우리 생활에 실제로 적용되는 법체계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알게 되었습니다. 아파트 재계약을 놓고 채권법에서 배운 원칙이 전혀 통하지 않는 것을, 이주노동자 노조위원장을 통역하면서 상정되지도 않는 수정법안 근거만으로 고용주들이 노동자의 생사를 가르는 횡포를 휘두른다는 것을, 임신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해도 저항을 위한 현실적인 요건들을 법이 보호하지 않고 있는 것을, 동창의 가난한 친구가 돈이 없어서 합의금을 못 내어 감옥에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보며 경제계층간에 법의 적용의 차이가 생각보다 크게 존재한다는 것을… 실질적 법의 세계는 4년 동안 꾸역꾸역 내면화시키려했던 법 이론의 세계와 거리가 너무 멀었습니다.
차라리 입시생 시절 원했었던 데로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할걸, 꾸역꾸역 내면화시켜야 했던 시절보다 오히려 사회에 나와서 더 많이 후회했습니다. 문학보다 더 허구적인 학문을 공부한 격이니까요.
우리에겐 특별법이 필요해
그래도 완전한 시간낭비는 아니었습니다. 앞서 말한 아파트 재계약은 이렇게 해결했습니다. 법대에서 배운 유일하게, 정말로 유일하게 쓸데 있는 것은, 아무런 거부감 없이 길고 복잡한 법안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습관이었습니다. 민법은커녕 주택임대차보호법도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제가 살고 있는 임대아파트를 지배하는 가장 구체적인 법 규정을 어렵게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한 달 안에 집을 비우라고 갑작스럽게 명령한 관리사무소가 항목 깊이 묻혀있는 법조문 하나를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바로 공공주택을 담당하는 공사에 신고했습니다. 12시간 안에 관리사무소에서 재계약 했습니다.
비전공자들도 많이 아는 법 적용의 원칙 중, 상위법 우선의 원칙이 있습니다. 실정법상 상위의 법규는 하위의 법규에 우월하다, 즉 헌법>법률>명령>조례>규칙의 순서로 우월하다는 사실이죠. 하지만 이것이 과연 사실일까요? 대한민국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헌법을 읽었을 때의 느낌은 공상과학 소설을 읽는 느낌과 비슷할 것입니다. 뭔가 우리 사회와 비슷한 듯 하면서도, 너무나 꿈나라 같은 이야기. 계속 읽다보면 우주정거장에서 태어난 이들에 대한 영주권 얘기도 나올 것 같습니다. 아무리 상위법 우선의 원칙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이를 관철하기 위해 드는 경제적, 사회적 리스크와 비용이 엄청날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의 모든 부조리를 헌재에 제소시킬 수도 없고, 제소시킨다한들(최근 군형법 92조 판결에서 볼 수 있듯이) 헌재 재판관들이 과연 헌법정신을 수호할지가 의문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특별법 우선의 원칙은 비교적 관철하기 쉽습니다. 특별법 우선의 원칙이란 일반법과 더 구체적인 특별법이 충돌했을 때 특별법이 우선한다는 원칙입니다. 앞서 얘기한 제 아파트 재계약 사건이 이런 사례입니다. 제가 관리사무소에 헌법 조항을 들고 가서 나에겐 주거권이 있다고 주장했다면 (심지여 주택임대차보호법을 들고 갔어도) 비웃음만 받았을 테죠. 친구가 붙잡혀 들어간 경찰서에서 형법상 원칙에 대한 저의 주장들을 경찰관들이 씁쓸하게 웃어넘겼듯이.
이미 성소수자들의 권리를 언급한 특별법이 존재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특별법을 설치근거로 한 국가인권위원회는 성소수자를 인권 보호 대상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권위의 법적 지위 상, 인권위에 호소를 해도 권고만 받아낼 수 있고, 인권위는 강제성이 있는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으며, 그것마저도 현 정권하 정치적으로 왜곡되어버린 상황입니다.
우리들을 위한 특별법, 차별금지법의 등장… 그리고 몰락… 그리고 희망
2008년 겨울, 여러 전문가들과 시민단체들이 참여해서 만든 차별금지법 법안을 입법시키려는 과정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언급을 포함하여 여러 차별금지대상 항목들을 삭제시켰고 강제성 있는 조항들을 약화시켜, 차별금지법을 인권관련 전시행정으로 전락시켜버렸습니다. 성소수자 진영은 “차별을 조장하는 차별금지법 반대운동”으로 공동행동에 나섰고, 결국 차별금지법 상정은 무기한 보류되었습니다.
차별금지법안 원안 고수를 위하여 공동행동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고, 진보신당 성정치위원회도 여기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종교, 경제인 단체들의 저항으로 차별금지를 향한 걸음이 느려지고 있긴 하지만 우리가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느낌만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소원이 하나 생겼습니다. 차별을 받아야만 했던 수많은 순간들에, 열폭하면서 로앤비를 뒤지며 법안을 찾아내, 뽑아놓고 차별 가해자에게 조항을 내밀며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법대로 합시다.”
정일 / 성정치위원회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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